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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설립자 심산 김창숙 선생 63주기를 기리며
- 총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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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3
윤영선(경제 76, 전 관세청장)
심산 기념사업회 회장
지난 5월 10일 광복 후 성균관대학 설립자(1946년), 초대 총장(1946~1956년), 초대 성균관장, 초대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을 지내신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의 서거 63주기 추모제를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심산 선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애국자이고, 유림의 지도자였고, 민족 교육의 선구자이시다. 심산 선생은 광복 후 정치권에서 당수로 초빙 등 정치 제안을 뿌리치고, 미래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인재 양성을 위해 근대 교육기관인 성균관대학을 세우신 분이다. 조선 초기 1398년 창설된 성균관(成均館)은 고위 관료를 양성하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국립대학 기능, 한국과 중국의 36명의 유학자를 제사 지내는 기능을 하였다. 일제가 1911년 민족정기 말살 정책 일환으로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켰다.
심산 선생이 일제가 폐지한 성균관을 1946년 근대 대학으로 부활시킴으로써 건학 627년 전통의 현재 성균관대학은 세계 100위권의 대학으로 우뚝 성장하였다. 심산 선생의 묘지는 수유리 ‘4.19 국립묘지’의 뒤편 북한산 산줄기에 있다. 심산 선생 묘지는 문화재청에서 201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보훈부는 심산 선생 묘지를 ‘국가 관리묘역’로 지정하여 묘지관리와 추모행사 지원을 한다. 금년 63주기 추모제는 강정애 보훈부 장관이 참석하여 심산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도사를 하여 행사를 더욱 값지게 하셨다.
심산 선생은 1879년 경북 성주에서 유림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1962년 5월 10일 향년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유학자 중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가장 대표적인 선비이시다. 심산 선생이 돌아가신 1962년도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통치하던 시기이다. 심산 선생의 서거 후 장례식을 “국장”으로 할 것인지 논쟁이 있었다. 당시 최고회의는 장례식을 심산이 정부의 공직을 담당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사회장”으로 정하고, 9일간의 애도 기간을 정했다. 묘터로 정부는 지관이 정한 북한산 두 곳을 유족에게 추천하여 정하도록 했다. 심산 선생은 1926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부의장(현재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셨고, 건국훈장 1등급(김구, 안중근, 윤봉길 등 31명만 수훈자임)을 수상하였으므로 현재 기준으로 보면 국장으로 치러야 함이 옳으나, 당시 정부는 공직의 범위를 좁게 해석하여 사회장으로 치렀다.
김창숙 선생은 본인의 호를 맹자의 ‘부동심’(不動心)에서 따와서 산처럼 마음을 굳건하게 유지한다는 의미로 ‘심산’(心山)으로 정하였다. 심산이라는 호처럼 평생을 성대의 건학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에서 ‘절의(節義)’를 중시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평생을 사신 조선시대 마지막 성리학자이자 강직한 선비이시기도 하다. 심산 선생은 1927년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한국으로 이송되어 14년 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 등에서 수감생활을 하셨다. 재판 과정에서 심산을 존경하는 변호사가 변호를 자원했다. 심산 선생은 “나는 일본의 강점과 통치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나는 일본의 포로이다. 일본통치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변호사를 거절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심산의 이러한 성품 때문에 다른 독립운동가보다 훨씬 장기의 형기를 받고 복역하시다가, 병이 위중하여 복역 8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셨다. 재판 과정에서 일경의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다른 사람의 부축이 있어야만 거동하는 장애가 생겼음에도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아니한 몇 안 되는 절의를 지킨 애국지사이다. 특히, 성균인들이 오래오래 기억해야 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