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동창회 뉴스
고투의 시간과 디저트 - 손성준(영문 97) 모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 총동창회
- 조회수237
- 2025-05-23
고투의 시간과 디저트
손성준(영문 97, 모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2025년 4월 18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박현수(국문 86,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의 최신 저서,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한겨레출판, 2025.3)의 출판을 기념한 북토크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인문관의 대형강의실이 저자의 선후배, 동료와 제자들로 가득 찼다. 이날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축제였다.
그의 이번 저서는 각별하게 기념되어야 마땅하다. 우선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라는 책 자체가 지닌 탁월함이 있다. 박현수는 제목에 있는 호떡과 초콜릿을 포함하여 커피, 만주, 멜론, 라무네(레모네이드), 군고구마, 빙수까지 총 8가지 디저트가 처음 한국에 들어온 100여 년 전의 풍경을 섬세한 필치로 재현하였다. 인문역사서로 분류되는 이 책이 여타의 문화사 서적과 차별화된 점은 단연 그가 풍부하게 활용하는 다종다양한 근대소설과 서브 텍스트에 있다. 이 책이 그저 개별 디저트를 둘러싼 객관적 사실들의 나열에 머물지 않았던 것도 그의 주재료가 바로 당대의 언어를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구사하던 문인들이 남긴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박현수가 재현한 풍경 속 주인공은 사실 디저트가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던 ‘사람들’이다. 디저트는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그 사람들의 숨결을 전해주는 매개일 따름이다. 이를테면 박현수는 커피라는 디저트를 소개할 때 공간으로서의 ‘다방’에 집중할 필요성을 느꼈다. 곧 다방은 작가 이상(李箱)의 말을 변주한 박현수에 의해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고단하고 암담한 현실에서 고독한 꿈이 다른 꿈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공간”(56쪽). 이처럼 박현수의 언어는 식민지 문인들의 목소리와 적재적소에 결합함으로써 매우 풍성하고 밀도 있게 증폭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기념해야 할 이유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전사(前史)다. 이는 책을 선보이기 전까지 박현수가 걸어온 한국문학 연구자로서의 시간을 뜻한다.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그가 2022년에 낸 <식민지의 식탁>(이숲), 2023년에 낸 <경성 맛집 산책>(한겨레출판)에 이은 ‘음식’ 3연작의 세 번째 책이다. 이쯤 되면 출판사가 저자를 소개하며 붙인 ‘국내 유일 음식문학연구자’라는 수사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이 3연작 직전에 낸 책은 <근대 미디어와 문학의 혼종>(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1)이었다. 쭉 거슬러 올라가면, 그가 1999년도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은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현진건 등 익숙한 작가들과 그들의 소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박현수는 늘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했다. 2021년의 책 제목에 맨 앞에 ‘근대미디어’를 내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근대문학의 거처였던 ‘인쇄미디어’의 물질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로운 문학 연구에 매진해 왔다. 자연스레 늘 실증적 판본 비교를 중시했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신자료도 발굴했다.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작가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탐구하였고, 미디어 자체가 밥줄이던 ‘기자로서의 작가’라는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조명했으며, 미디어를 속박하던 검열과 필화사건을 접목한 성과도 발표하였다. 박현수는 이러한 물적 토대에 놓여 있던 식민지 작가의 체험이 작품에 구현되는 양상을 언제나 꼼꼼하게 따져 물었다. 그렇기에 그의 연구에는 ‘거짓도 없고 게으름도 없다’.
요컨대 ‘음식문학연구자’ 박현수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근대미디어와 문학의 혼종>을 구성하고 있는 논문들을 생산하던 시기, 지금의 박현수를 예견한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고투, 대학원 시절까지 소급하면 약 30년에 걸친 박현수의 담금질은, 결국 그의 나이 50대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도록 이끌었다. 그가 오랜 시간 관찰하고 기록하며 축적해 두었던 문제의식, 크고 작은 생각의 조각 하나하나가 이제는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학 서적 안에서 새로운 성좌도(星座圖)를 만들며 빛나고 있다.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가 출간 한 달 만에 2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며칠 전 들려왔다.
최근 반년간, 세상은 어느 때보다 혼탁했다. 그렇기에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더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단순한 진리, 달리 말해 고투의 시간 끝에 달콤한 보상이 뒤따르리라는 믿음을 붙들고 산다. 그런 의미에서 박현수의 신간 소식은 놀랍고 반가웠으며,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물론 모든 식사에서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자격 있는 모두에게 반드시 보상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위로의 본질은 그들의 달콤한 성공보다는 그들이 감내했던 기나긴 고투의 시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박현수 교수가 북토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