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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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칼럼] 대성전 앞 전각 '행단' ...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 가르쳐 - 윤영선 (경제 76) 전 관세청장·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윤영선(경제 76, 전 관세청장) 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본지는 모교의 건학이념인 유교정신의 뿌리를 되새기기 위하여, 공자의 발자취가 서린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의 공묘(孔廟)와 공림(孔林) 유적을 직접 답사한 윤영선(경제 76, 전 관세청장) 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의 기행문을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두 번째 편으로, 공묘(孔廟)와 성균관 문묘의 역사적·상징적 연관성을 통해 유교 교육 전통과 그 계승의 의미를 조명한 답사기를 소개한다. 고관대작인 경, 대부의 쇠락한 자손, 패망한 제후국의 자손과 귀족들은 사(士) 계급을 형성한 지식인 집단이다. 공자 이전의 한자 유(儒)의 뜻은 학문을 공부하는 지식인 또는 선비의 의미였으나, 공자 이후는 공자의 유가(儒家) 집단의 의미로 바뀌었다. 공자는 3,000명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많다’는 과장이지만, 이들은 대부분 사(士) 계급으로 공자에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공부를 하여 유가(儒家) 집단을 만들었다. 공자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설 학원 원장인 셈이다. 공자는 제자를 택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형편이 어려우면 학비를 안 받았다고 한다. 당시의 사(士) 계급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제후국의 관리로 출세하고자 했던 야망이 있는 지식인 집단이다. 공자 사당 공묘(孔廟)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으로 중앙에 공자의 영정과 좌우로 4성(聖) 위패 (안회, 자공, 자사(손자), 맹자(자사의 제자))가 있다. 공자는 중국 역사상 황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서 대성전 지붕도 황제만 쓸 수 있는 황금색 기와이고, 돌기둥의 조각상도 황제의 상징 동물인 용(龍) 조각을 허용했다. 우리 성균관 대성전(문묘)에도 중앙에 공자를 정위(定位)로 하고, 양옆에 4성이 위치하고, 좌우 양쪽으로 많은 유학자가 배열되어 있다. 1398년 대성전 만들 때 중국의 문묘를 본받아 공자, 4성, 10철, 72현을 배향하였다. 조선 세종(1420년)때 우리나라 유림도 배향을 처음 시작했다. 설총, 최치원, 안향(성리학 도입), 정몽주 등이다. 배향 인물은 시대별로 변천을 거듭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이퇴계, 이율곡, 조광조 등 시대별로 추가 되었다. 현재 대성전에 한국 유림 18위, 중국 유림 94명이 배향되어 있다. 이율곡(이이)선생은 숙종때 대성전에 배향되었으나 신사임당 사망 후 1년 동안 금강산에서 불경 공부한 것을 이유로 반대 당파에서 율곡을 문묘에서 퇴출시켰다. 이후 문묘에 다시 복향하는 굴곡을 당했다. 현재 배향된 18명 유림 중에 학식이 낮은 몇 분이 포함되어 있어 후세의 논란이 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후대에 복권된 개국공신 성리학자 정도전이 빠진 것은 아쉬움이다. 대성전 건물 현판은 조선 중기 명필 ‘한호’(호 한석봉. 1543~1605년)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다시 쓴 것이다. 대성전(大成殿) 뜻은 도(道)의 완성자인 공자를 모신다는 뜻이다. 공묘의 대성전 바로 앞에 있는 전각의 현판은 ‘행단(杏壇)’이다. 이곳은 은행나무가 있던 곳으로 과거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장소라고 한다. 행단(杏壇)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은행나무 아래 교단’ 뜻이다. 모교 상징인 은행나무 잎 문양은 행단(杏壇)이 기원이다. 현재 공묘의 정원에 있는 나무 중에 은행나무는 없어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필자는 작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보았다. 향나무 일종인 측백나무만 공묘 정원 곳곳에 가득 심어있다. 향나무는 수령을 오래 살고, 향기 냄새로 인해 새들이 안 살아서 주위를 정갈하게 만든다고 한다. 수령이 수백년 이상 되는 고목의 측백나무가 공묘, 공부, 공림 곳곳에 심어있다. 모교의 대성전과 명륜당 뜰에 있는 은행나무는 조선 중종때 대사성(성균관 관장)이던 ‘윤탁’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수령 600년이 넘는 위풍당당한 나무로 건학 630여 년의 성균관대학 역사를 상징하는 거목(巨木)이다. 윤탁은 조선 중종때 대사성을 두 번(1518년, 1525년) 역임했으며 학문이 높아서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윤탁은 평소 제자들에게 “뿌리가 단단하면 가지가 무성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윤탁 대사성 말씀대로 건학 627년 역사의 성균관대학이 세계의 초일류대학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모교 600주년 기념관 1층 벽에 조선시대 대사성(현재 총장)을 지낸 인물 이름이 전부 기록되어 있다. 필자의 19대 직계 조상인 세종때 윤회(尹淮) 선생의 이름이 있어서 직접 찾아본 적이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1398년 성균관에 지은 건물로 유생들에게 강의하던 교실이다. 현재 성균관의 ‘명륜당’ 현판은 조선 선조(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의 글씨이다. 주지번은 당시 유명한 문인, 서예가로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문묘에서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감동받아 현판을 썼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전소되었기 아마도 현판을 다시 쓸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륜(明倫)의 어원은 맹자의 ‘등문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학교를 세워 교육을 하는 것은 인륜을 밝히는 것(명륜(明倫)이다”라고 말한다. 명륜당 건물 내부에 송나라 ‘주희’(주자)가 쓴 ‘명륜(明倫)’이란 현판이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보지 못했다. 현재 명륜당 마루 위에 ‘박문약례(博文約禮)’ 현판이 걸려 있다. 뜻은 “학문을 널리 펴고 익혀서, 예로서 실천한다.” 의미이다. 공자의 77대 장손인 ‘공덕상’이란 인물이 근세 명륜당을 방문하고 쓰고 간 글씨이다. 공자의 장손 공덕상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후퇴할 때 함께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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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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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칼럼] 겨울철에도 식중독 '주의보'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성균관의과대학교 임상영양연구소장/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
-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성균관의과대학교 임상영양연구소장/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 57세 남성이 복통, 구역, 구토와 설사가 심하여 내원하였다. 미열과 두통, 근육통이 동반되었는데 특별히 상한 음식을 먹은 기억은 없었다. 대변과 구토물을 검사한 결과 노로바이러스 감염으로 밝혀졌다. 질병관리청 실험실 감시에 따르면, 초가을부터 노로바이러스 검출률이 증가하며 매년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발생 신고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금년 11월 2~8일 70명이던 노로바이러스 환자 수가 11월 9~16일에는 94명으로 34% 증가하였다. 이는 지난해 같은 주차의 45명과 72명보다 큰 규모로, 이번 겨울 노로바이러스 유행 규모 증가와 전파 가능성에 대한 주의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노로바이러스는 갑작스러운 구토와 설사를 유발하는 전염성이 매우 높은 바이러스이다. 흔히 오염된 음식이나 물, 음료수에 의해 전파되며, 노로바이러스 감염자와 밀접 접촉을 해도 전염될 수 있다. 또한 노로바이러스에 오염된 물건이나 표면을 손으로 만진 후 자신의 입에 손을 대어도 감염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밀접 접촉을 하며 지내게 되는 병원, 요양원, 어린이집, 학교, 크루즈 선에서 대유행이 발생할 수도 있다. 노로바이러스는 고온과 저온 환경에서도 잘 죽지 않고 세정제를 써도 살아남는 경우가 많아 문제이다. 노로바이러스 감염은 노출 후 12~48시간 내 설사, 복통, 구토 증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발열, 두통, 근육통이 동반될 수 있다. 대부분 증상은 1~3일간 지속되다 자연 회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린이, 노인, 임산부, 면역저하자와 만성질환자는 구토, 설사로 인한 탈수가 빠르게 악화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증상이 사라진 이후에도 최대 수 주간 대변을 통해 바이러스를 배출할 수 있어, 가족과 지역사회 내 추가 감염 위험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개인위생 관리와 환경 소독의 철저한 실천이 거듭 강조된다. 노로바이러스 감염은 전형적인 증상만으로 임상 진단과 치료가 가능하다. 다만 집단 발병 확인이나, 면역억제자에서 다른 감염과의 감별 등 필요한 경우에 한해 바이러스 확인 검사를 고려한다. 검사 필요 여부는 의료진의 임상 역학적 판단에 따르게 된다. 바이러스 확인은 대변이나 토사물에서 바이러스 핵산을 검출하거나 효소면역법으로 바이러스 유사입자를 검출하여 이루어진다.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감염을 치료하는 특별한 약은 없기 때문에 회복이 될 때까지 탈수가 되지 않도록 물이나 이온음료를 많이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피로, 갈증, 현기증, 소변량 감소 등 탈수 증상이 심할 경우 병의원에서 수액 치료를 받아야 한다. 노로바이러스는 감염력이 매우 높고, 다양한 유전형이 존재하여 여러 번 감염될 수 있으므로 예방이 매우 중요하다. 화장실 사용 후, 음식 조리 전, 식사나 음료 섭취 전에는 20초 이상 비누로 손을 철저히 씻어야 한다. 감염자가 준비한 음식과 음료수는 먹지 말고, 해산물은 익혀 먹으며, 과일과 채소는 먹기 전에 잘 씻어야 한다. 노로바이러스 감염자는 증상이 소실된 후에도 2~3일간 불필요한 외출과 대면 접촉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겨울철에는 음식 매개 감염에 대한 경계심이 여름철보다 낮아 노로바이러스 식중독으로 건강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노로바이러스에 대한 상용 백신이 아직 없으므로 예방이 핵심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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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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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칼럼] 순유(純儒)와 진유(眞儒)- 조민환(유학 76) 전 모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 조민환(유학 76) 전 모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유학자에 대한 다양한 분류 유학자들은 한 인물을 분류할 때 학문, 인품, 처세 등을 감안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경우에는 순유(純儒), 진유(眞儒), 순유(醇儒), 준유(俊儒), 통유(通儒), 홍유(鴻儒), 대유(大儒) 등을 사용한다.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에는 소유(小儒), 속유(俗儒), 누유(陋儒) 등을 비롯하여 더 많은 용어가 있다. 수유(豎儒), 부유(腐儒), 비유(鄙儒), 구유(拘儒) 등은 주로 조롱할 때 쓴다. 도유(盜儒), 천유(賤儒), 이유(俚儒), 공유(空儒) 등은 배척할 때 쓴다. 도의 근본을 어기고 떠나면 벽유(僻儒)라고 한다. 이 가운데 부유(腐儒)의 경우는 두가지로 사용된다. 자신이 스스로 부유라고 하는 경우에는 겸칭에 속한다. 하지만 남에게 부유라는 표현을 하거나 듣는 경우에는 부정적인 것에 속한다. 중국 송대 이전 인물 가운데 유학자로 평가받았던 동중서(董仲舒)는 순유(醇儒), 정현(鄭玄)은 순유(純儒), 양웅(揚雄)을 대유라 일컬었다. 홍양호(洪良浩)는 한나라 가의(賈誼)가 경세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유(通儒)라 하는데, 정조(正祖)는 대유라고 한다. 송대에서는 진유라는 표현을 통해 송대 유학자를 규정한다.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 등을 진유로 꼽고, 그들에 의해 공맹(孔孟) 유학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장재(張載)는 순유(醇儒)라고 하여 정주(程朱)와 차별화하여 이해한다. 진유라는 표현은 조선조 이전에도 있었지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유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조에 와서다. 윤근수(尹根壽) 문인인 조경(趙絅)은 순유와 진유를 통해 고려와 조선조의 유학자들을 비교 평가한다. 신라의 문창후(文昌侯:崔致遠), 홍유후(洪儒侯:薛聰)와 고려의 문헌공(文憲公:崔冲), 문성공(文成公:安裕[安珦])이 혹은 파천황으로 혹은 독행(篤行)으로 한 때 이름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순유(醇儒)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 아름다운 조선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성인이 일어나시어 진유(眞儒)의 무리가 나왔으니, 오천(烏川:鄭夢周))을 이어 계승한 자는 정암(靜庵:趙光祖)과 회재(晦齋:李彦迪)가 그 사람이다. 도산(陶山) 이선생(李先生:李滉)은 더욱 위대한 분이다. 조선조의 순유와 진유 조선조에 오면 정도전(鄭道傳),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등 많은 인물들이 진유로 거론된다. 기대승(奇大升)은 통유로 본다. 순유(醇儒)는 독실한 자세[慥慥]를 견지하는 인물을 꼽는다. 이만부(李萬敷)는 동정(動靜)이 서로 함양되고 표리(表裏)가 서로 보탬이 되어 몸에 덕을 닦았기에 순유(醇儒)로 평가된다. 간혹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인물이라도 달리 일컬어지는 경우도 있다. 장유(張維)는 흔히 진유라고 일컬어지는 정몽주(鄭夢周)를 통유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유는 과연 어떤 인물상을 말하는 것일까? 율곡은 도학을 하는 선비를 진유(眞儒)라고 하는데, 진유에 대해 가장 정치하게 논한 인물은 허균(許筠)이다. 일찍이 보건대, 소위 진유(眞儒)란 세상에 쓰이게 되면 요(堯)·순(舜) 시대의 다스림과 우(禹), 탕(湯), 문(文), 무(武)의 공적이 사업에 나타난 것들이 이와 같았다. 쓰이지 못하더라도 공(孔), 맹(孟)의 가르침과 염(濂), 낙(洛), 관(關), 민(閩)의 학설을 책에 기록한 것들이 또 이와 같아서 비록 천만년이 지나도 이의(異議)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공적인 것[公]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학자에 대한 다양한 분류가 있는 가운데 주목할 것은 누구를 순유(純儒)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유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거의 적기 때문이다. 정조는 한림(翰林)에 조용히 깃들어 있으면 순유(純儒)라 하는데,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치제문」에서 퇴계를 순유로 본다. 내가 전형을 생각하며(予懷典刑), 자나 깨나 순유를 잊지 못하여(寤寐純儒),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의 소차(疏箚)를 자세히 살피고(箚玩六條), 성학십도(聖學十圖) 병풍을 걸었다네(屛揭十圖), 도산도(陶山圖)를 그려 사모의 정성을 깃들인다.(繪居寓慕) 송시열(宋時烈)도 퇴계를 우리나라 최고의 순유로 보는데,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주자대전』에 대한 퇴계의 이해다. 송시열은 주희를 성인처럼 존숭한다. 송시열의 입장에서 볼 때 『주자대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었던 퇴계를 순유로 높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무오류적 진리 인식이란 담겨 있다. 퇴계 이외에 순유라고 거론된 인물은 율곡이다. 조익(趙翼)은 「증(贈) 영의정 이이(李珥)에게 사제(賜祭)한 글」에서 율곡을 거유(巨儒)라 하고 순유(純儒)라고도 한다. 조익이 율곡을 순유라고 한 평가는 주로 학문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조익이 율곡을 종주로 모시는 서인(西人)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순유라는 것이 그렇게 한정된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퇴계가 ‘순유(純儒)’인 이유 퇴계가 순유로 평가받는 구체적인 것을 퇴계 사후 퇴계를 추숭한 글을 통해 살펴 보자. 조익은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에게 올린 제문」에서 퇴계의 학문과 추구한 삶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낙민(洛閩)의 학문을 이어받고서[學紹洛閩], 산림에 살지게 은둔하셨도다[遯肥山林] 趙翼, 浦渚集 卷之二十九 「牙山五賢書院祝文:祭退溪李文純公文」. 조익은 퇴계의 삶을 두가지로 압축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는 퇴계의 학문경향과 다른 하나는 퇴계의 처세다. 낙(洛)은 낙양(洛陽)에서 활동했던 북송대 정호와 정이의 학술사상을 말하고, 민(閩)은 민중(閩中)에서 활약했던 남송대 주희의 학술사상을 말한다. 퇴계는 흔히 정주이학(程朱理學)으로 불리운 학문을 그대로 이어받아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비둔이 상징하는 삶, 즉 세속적인 명리 추구에서 벗어나 도산에 신퇴한 다음 비둔적 삶 속에서 ‘그윽함[幽]’, ‘조용함[靜]’, ‘차가움[寒]’, ‘한가로움[閒]’, ‘맑음[淸]’, ‘숨음[隱]’ 등으로 상징되는 한거(閑居)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은 퇴계가 읊은 많은 시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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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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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칼럼] 하늘에서 만난 푸른 침묵 - 이훈구(산업심리 86,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 부국장)
- 이훈구(산업심리 86)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 부국장 인도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빚어낸 거대한 파노라마를 헬기에서 담았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깊은 설산은 시간이 멈춘 듯 빙하호에 닮은 꼴을 만들었습니다. 호수는 하늘과 산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되어 한층 더 깊은 색채를 만들었습니다. 자연의 시간이 영겁(永劫)이라면, 인간의 역사는 찰나(刹那)에 불과합니다. 다시 한해의 끝자락, 그 어느 때보다도 독선과 분열의 언어들이 난무했던 시간들! 위대한 자연의 침묵 앞에서 겸손과 성찰의 시간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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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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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칼럼] 캠퍼스둘러보기 - 경영관 열람실, 카페같이 아늑한 학습 공간
- 경영관 지하 1층에 위치한 경영관 열람실은 학생들의 학습을 지원하는 핵심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조용한 분위기를 갖춘 이곳은 학생들이 과제, 시험, 팀 프로젝트 준비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학생들이 찾는 대표적인 학습 장소이다. 경영관 열람실은 오전 6시부터 자정(24시)까지 운영되며, 토요일,·일요일 및 공휴일에도 동일한 시간대에 개방되어 학생들이 주중과 주말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경영관 열람실은 학부열람실 A와 학부열람실 B로 나뉜다. 학부열람실 A는 스터디 카페형 공간으로, 노트북 사용과 키보드·마우스 클릭이 허용되며, 조용한 대화도 가능하다. 반면 학부열람실 B는 정숙을 기본으로 하는 독서실형 공간으로, 키보드 및 마우스 소리가 금지된다. 따라서 노트북이나 전자기기를 사용할 경우 반드시 학부열람실 A를 이용해야 한다. 이용 전에는 좌석 발권이 필수이며, 키오스크나 학술정보관 모바일 앱을 통해 발권할 수 있다. 좌석 이용 시간은 최초 4시간이며, 종료 2시간 전부터 연장할 수 있다. 이용 대상은 학부생으로, 휴학생·수료생·졸업생도 포함되지만, 중간·기말고사 기간에는 졸업생의 이용이 제한된다. 또한, 지정 좌석 외 사용 금지, 음료 이외 음식물 섭취 금지 등의 기본적인 이용 규칙이 있다. 쾌적하고 효율적인 학습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은 이러한 규칙을 준수하며 열람실을 이용해야 한다. 김은교(경영 23)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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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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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칼럼] 헤맨 만큼 내 땅이다 - 장혜민 (융합생명공 23)
- 장혜민(융합생명공 23)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익숙한 방 대신 낯선 기숙사에 머물러야 했고, 오랜 친구들 대신 처음 보는 얼굴들이 내 곁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렘은 외로움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기숙사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복잡한 강의실에 홀로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킬 때마다 어딘가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곳에서 버텨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대학교 생활은 생각보다 더 치열했다. 학점, 대외활동, 공모전, 자격증, 심지어 취미까지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안했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금세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쉴 틈 없이 달렸던 것 같다. 무언가를 성취해야 안심이 되었고, 인정받아야 가치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시험을 잘 봐도 기쁘지 않았고, 홍보대사로 선발되어 그토록 원하던 단복을 입었을 때도 마음이 공허했다. 남들이 괜찮다고 말하던 학과에 전공 진입을 했지만 오히려 우울했고, 즐겁던 취미마저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표를 이뤄가는 순간이 이토록 공허하게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때 나는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내 우울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니라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좋은 대학생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고, 원하지 않는 활동들로 일상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을 돌보는 일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결국 나는 내가 만든 답답한 계획표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렸다. 하루는 모든 일정을 미뤄 두고 모자를 눌러쓴 채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생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다른 누군가보다 빨리 가야 한다는 강박은 불필요한 짐이었고, 누군가의 시선에 맞춰 사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씩 나의 속도와 기준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무엇을 선택하든 이유를 분명히 하려고 한다. 공모전에 나갈 때도, 대외활동을 할 때도, 하려고 하는 일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남들이 해서 나도 하는 것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활동인지를 깊게 고민한다. 나의 기준이 생기자 일상 자체가 훨씬 단단해졌다. 비슷하게 바쁜 하루를 보내더라도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불안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의 성취가 부러울 때가 많고, 여러 일들을 척척 잘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 켠에서 못난 열등감이 자라난다. 하지만 예전처럼 나를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지금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것에 나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조급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멈추지만 않는다면 지금의 속도로도 충분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길을 잃었던 순간이 나를 찾게 만든 시간이었고, 나에게는 값진 경험들이 남았다. 결국 헤맨 만큼 내 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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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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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칼럼] 공자 유적,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 윤영선 (경제 76) 전 관세청장·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본지는 모교의 건학이념인 유교정신의 뿌리를 되새기기 위하여, 공자의 발자취가 서린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의 공묘(孔廟)와 공림(孔林) 유적을 직접 답사한 윤영선(경제 76, 전 관세청장) 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의 기행문을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첫 번째 편으로, 공자의 생애와 유가(儒家) 철학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성균관과의 역사적 연관을 중심으로 한 답사기를 소개한다. 윤영선 (경제 76) 전 관세청장·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지난 10월 중순 모교 경영대학 W-AMP 졸업여행으로 중국 산동성 곡부의 공자 유적을 보고 왔다. 성균관대학 입학 후 은행나무가 무성한 ‘성균관’ 담벽을 지날 때마다 언젠가 공자의 유적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지 50년 만에 오래된 소망을 실현하였다. 조선시대 왕이 정기적으로 제향을 행하는 곳은 종묘(역대 왕과 왕비 사당)와 문묘(공자 사당) 두 곳이다. 문묘(文廟)(대성전)은 성균관의 핵심 건물이다. 대성전(문묘)는 조선시대 신성한 장소로 왕을 제외한 사람은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 하마비(下馬碑)는 지금도 성대 정문 앞에 영조가 세운 탕평비(蕩平碑)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 모교의 뿌리인 성균관(成均館)은 1398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 후 명륜동에 세웠다. ‘성균관’ 어원은 중국 고전 ‘예기’(禮記)의 성균지도(成均至道)에서 시작한다. 한자 ‘성균’(成均) 은 “인심과 예악을 고르게 하여 사회의 조화를 이룬다”이다. ‘성균관(成均館)’은 “인재를 양성하고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을 말한다.” 성균관 명칭은 아마도 개국공신이자 성리학자인 ‘정도전’이 작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육기관 성균관은 고려시대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의 3공(孔) 지보(至寶)는 공자 사당 공묘(孔廟), 공자 후손들의 마을인 공부(孔府), 공자와 공씨 후손들 묘지인 공림(孔林)으로 되어있으며, 각각이 매우 넓은 면적이다. 곡부의 공자 유적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약 2,600여년전 인류 역사에 위대한 스승 세 분이 태어났다. 중국 노나라의 공자(BC 551년 탄생), 공자보다 10여년 먼저 탄생한 인도 석가국 붓다(BC 563년), 공자 사후(BC 479년) 10년 후 탄생한 아테네의 소크라테스(BC 469년 탄생)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명저인 ‘축의 시대’에서 기원전 1,000년 동안에 인류 정신문명의 대변혁을 가져온 현자들이 거의 태어났다고 했다. 공자, 노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조로아스터, 이스라엘 예언자들(이사야, 예레미아), 예수 등이다. 위대한 스승들의 업적은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정신의 자각, 내면의 양심, 정의, 자비, 진리 탐구 등 보편 윤리와 도덕 사상의 탄생 등으로 오늘날 인류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儒家) 사상과 유교(儒敎)문화는 우리 한민족의 2,000여년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가져왔고, 특히 우리 모교인 성균관대학의 건학이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자의 가문은 춘추(春秋)시대 송나라의 쇠락한 귀족 출신으로 공자의 윗대 조상이 노나라로 이사 왔다고 한다. 공자의 아버지는 무인 출신으로 딸만 셋이 있었는데 아들을 얻기 위해 70세 나이에 젊은 17세 안씨 여인를 후실로 맞이하여 공자를 낳고, 73세 나이에 돌아가셨다. 홀어머니 젊은 안씨는 공자를 키우기 위해 현재 공묘가 있는 곡부로 이사 왔다. 공묘(孔廟)의 대성전 건물 바로 옆에 공자가 살았던 집이 있는데, 옛날은 초가집이었는데 지금은 기와집으로 공자의 후손들이 제사 지낼 때 사용한다고 한다. 안씨는 가난 속에서 공자의 교육에 힘썼고, 공자는 어린 시절부터 예(禮)와 악(樂)을 배우며 학문과 예절 공부에 전념하였다. 공자의 모친 안씨 부인은 ‘맹모삼천지교’로 유명한 맹자의 어머니보다 더욱 현명한 부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위대한 성인이자 대학자인 공자의 철학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춘추(春秋)시대 배경과 노(魯)나라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공자가 태어난(BC 551년) 지금부터 2,600여년전 중국은 주(周)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역의 제후들이 상시 전쟁하는 춘추(春秋)시대(기원전 770년~403년) 중기이다. 춘추(春秋)시대 이름은 공자가 지은 노나라 역사책 이름인 ‘춘추(春秋)’에서 유래한다. 노(魯)나라의 시조는 3,000년 전 주(周)나라 창업 공신인 ‘주공’이다. 주공(周公) 주나라 시조인 문왕의 동생이다.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조카 무왕의 숙부로 형인 문왕이 죽은 후 왕위 승계를 사양하고, 어린 조카를 보좌하여 주나라를 개국한 공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물산이 풍부한 현재의 산동성 땅인 노(魯)나라를 봉토(封土)로 받은 주 왕실의 핵심 인물이다. 공자가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주나라 개국공신인 주공과 그 후손이 보유 중인 노나라 서고의 귀중한 책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많은 독서를 하고 15세 나이에 학문에 전념하기로 뜻을 세웠다. 당시 서적은 죽간(竹簡) 책으로 매우 귀해서 일반인은 접근이 어렵다. 공자가 많이 읽었던 주역(周易)의 죽간 책 분량이 마차 한 대 분량이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책의 귀함을 상상할 수 있다. 춘추시대는 국가 간에 침략, 영토 확장 등 제후 국가들 간에 전쟁이 끊임없는 혼란의 시대이다. 춘추시대의 권력 서열은 천자, 제후, 고위 관리 경(卿)과 대부(大夫), 하급 관리인 사(士)로 나뉘고, 공자는 사(士) 출신이다. 공자는 청장년 시기에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제후를 보좌, 인(仁)과 예(禮)를 통한 덕치(德治)를 통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덕치(德治)를 실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54세의 나이에 노나라를 떠나서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에 나선다. 14년 동안 여러 제후국을 방문하여 인과 예의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주유천하 동안 밥을 굶은 적도 있고, 도적에게 목숨이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여러 제후 국가의 실상과 현실 정치를 경험하면서 공자의 학문적 깊이가 깊어지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게 된다. 논어의 많은 부분이 주유(周遊) 시기의 담론이다. 공자는 14년 방랑 끝에 68세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72세 사망까지 ‘주역, 춘추, 시경, 서경, 예기’ 등 5경(經) 서적을 편집, 집필 또는 주석을 달아서 후세의 유가 제자들이 공부하도록 밑바탕을 만들었다. 공자의 철학이 담긴 ‘논어(論語)’ 책은 공자 사후 제자들이 집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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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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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칼럼] 근감소증과 건강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성균관의과대학교 임상영양연구소장/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
-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성균관의과대학교 임상영양연구소장/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 73세 남성이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받은 후 골절은 회복되었지만 잘 걷지 못하고 쉽게 피곤해하였다. 병원에서 진료받은 결과, 중증 근감소증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6개월간 영양사 상담을 받으면서 적극적인 영양 치료와 운동 치료를 받은 후 환자의 상태는 크게 개선되었다. 근감소증은 나이가 들면서 근육량과 근력, 신체기능이 병적으로 감소하는 상태를 말한다. 근감소증은 단순한 노화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낙상, 움직임의 제약, 그리고 기능적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중요한 건강 문제이다.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에 의하면, 2022년 기준 65세 이상에서 근감소증 유병률은 7.9%(남자 6.6%, 여자 9.2%)로, 여성이 남성보다 높다. 70세 이상에서는 남성 9.6%, 여성 10.5%, 80세 이상에서는 남성 21.5%, 여성 25.9%로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근감소증은 급증하고 있다. 근육량과 근력은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증가하기 시작해 30대에 정점을 찍고 유지되다가 50세부터는 근육량이 매년 1~2%씩, 근력은 매년 1.5~5%씩 감소하게 된다. 근감소증의 건강 영향에 관한 연구를 모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사망률이 약 3.6배 상승하고, 신체기능 저하 위험이 약 3배 증가하며, 낙상과 입원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근감소증은 당뇨병과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을 높인다. 근감소증의 발생에는 노화로 인한 호르몬 변화와 단백질 합성 능력 저하, 신체활동 부족, 불균형한 영양 섭취 등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당뇨병, 감염병, 암 등과 같은 급만성 질환 등이 근감소증을 초래할 수 있다. 근력 저하와 하지 무력감, 피로감이 나타나거나, 계단 오르기나 물건 들기가 어려워진다면 근감소증을 의심해 볼 수 있다. 또한 걸음 속도가 느려지거나, 자주 넘어지거나, 균형 잡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근감소증의 증상일 수 있다. 근감소증은 근육량, 근력, 근 기능을 측정하여 진단하는데, 나이, 성별, 키, 몸무게, 지방량에 따라 근육량의 정상치가 다르다. 근육량은 골격 근육량을 측정하여 확인하는데, 이중에너지 방사선 흡수법, 전기저항체성분측정법, CT, MRI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근력은 다리 근력 또는 악력으로 측정하고, 근 기능은 보행속도 측정, 4미터 보행 검사, 6분 보행 검사 등을 실시하여 측정한다. 근감소증이 있다면 체중 1kg당 하루 1.0~1.2g의 단백질 섭취를 권장한다. 주의할 점은 이 단백질 섭취 권장량은 단백질 식품의 중량이 아니라 그 식품 안에 들어있는 단백질량이라는 점이다. 100g당 단백질 함량을 보면 가자미 구이는 18.7g, 닭다리 구이는 23.0g, 돼지불고기는 14.9g, 삼겹살 구이는 22.6g, 돼지갈비 구이는 28.2g, 등심 스테이크는 30.2g, 달걀부침은 15.7g으로 식품 종류와 조리법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육류 이외에도 각종 어패류, 두부와 김에도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아울러 근력운동, 유산소운동, 유연성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근감소증 개선에 중요하다. 근력운동으로는 덤벨, 탄력 밴드를 이용한 운동이나 스쿼트, 의자에 앉아 다리 펴기 등이 있으며, 유산소운동은 빠른 걷기, 수영 등을, 유연성 운동은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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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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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칼럼] 비둔의 삶과 명도구세 - 조민환(유학 76) 전 모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 조민환(유학 76) 전 모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칠원漆園」 古縣但遺基 옛 고을에 터만 남았는데 漆林官所植 옻나무 숲은 관가에서 심은 것이다. 見割有警言 베임 당하는 것에 깨우치는 말을 했으니 蒙莊亦高識 몽장[=장주]도 또한 식견이 높구나 이 시는 칠원漆園의 관리를 한 것으로 알려진 ‘몽골 땅의 장주[夢莊=莊周]’의 몸 보전 및 처세를 높이 평가한 시다. 이 시를 지은 인물은 놀랍게도 노장은 양기養氣 부분에 치우쳐 적성賊性에 이르렀다고 하고 구체적으로 장자莊子가 ‘훼성멸례毀聖蔑禮’하는 점 등을 거론하면서 장자를 폄하한 퇴계다. 이런 시는 지경持敬의 자세를 견지하고 계신공구戒愼恐懼하면서 신독愼獨 차원의 경외敬畏적 삶을 살았던 퇴계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의 이해가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한 인물이 행한 행적을 기리는 글에 종종 ‘공의 나머지 일이다[乃公餘事]’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사餘事’란 용어는 학문, 정치, 예술 등의 분야에서 뭔가 업적을 이룬 인물일 경우 그 인물이 ‘근본적으로 추구한 것과 대비되는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 혹은 시간이 났을 때 크게 의미를 두고 행하지 않은 것을 거론할 때 사용하곤 한다. 예를 들면 문장을 짓는다든지, 은일적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잠시 벼슬에 종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명도구세明道救世’를 지향하는 유학자인 경우 예술에 장기를 보이는 경우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밖에 예술 차원에서 ‘여사’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한 인물이 이성적 삶과 감성적 삶을 동시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이 퇴계의 여사를 문예 및 서예 차원에서 언급한 것을 보자. 선생은 시 짓기를 좋아하여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늙어서는 주자의 시를 더욱 좋아하였다...또 그 필법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진법(晉法)을 본받다가, 뒤에는 또 여러 가지 체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굳세고 건실하며 방정하고 엄한 것을 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글씨 한 자만 얻어도 마치 많은 금을 얻은 듯 보배롭게 여겼다. 그의 시문의 아름다움과 서법의 묘함은, 온 세상이 모두 스승으로 본받았으니, 여기에서 “덕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두루 통한 재주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선생이 ‘여사’로 한 것이니, 그것이 어찌 선생의 인격의 경중에 관계되겠는가. 비둔肥遯(유가와 도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열린 학문자세와 자기수양, 예술적 풍요, 자연과의 조화)의 삶을 산 퇴계에게 여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시문의 아름다움과 심화心畵 차원의 서예다. 최립은 ‘도道의 여사는 문장이고, 문장의 여사가 시’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율곡이 시가 편수가 적은 것은 율곡의 진면목을 파악하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율곡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퇴계에 비해 율곡이 시가 적었던 것을 보여준다. 후대 인물들이 퇴계와 율곡의 삶을 평가한 것을 참조하면, 비둔의 삶을 추구한 인물은 퇴계이다. 퇴계는 도산에 터를 잡은 이후 읊은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자신의 은거구지隱居求志의 삶을 비둔이라 읊고 있다. 윤두수(尹斗壽, 1533~1601)는 「율곡에 대한 제문(祭栗谷文)」에서 율곡에게 비둔은 ‘나머지 일[餘事]’에 속한다고 평하여 퇴계와 다른 삶을 살았음을 밝힌 것에 주목하자. 배운 것을 펴 보고자 하였고, 감히 행하는 일에는 용감하였네. 세상 길이 험난하여, 시비를 분별코자 힘써 싸웠네. 많은 유언비어가 하늘을 찔렀지만, 성명께서는 홀로 통촉하셨네... 오호라 슬프도다, 요순 때 임금과 백성같이 되게 하는 것이 공의 평소 뜻이라네. 임천에서 ‘살찌게 은둔하는 일[肥遯]’은 공에게는 ‘나머지 일[餘事]’이라네. 율곡이 험난한 세상에서 요순 때의 임금과 백성같이 되게 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는 것은 유학자가 지향하는 명도구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 비해 ‘임천에서 은둔하는 일[肥遯]’은 공에게는 ‘나머지 일[餘事]’이라는 것은 퇴계가 비둔을 지향한 삶과 비교되는 평가다. 조익(趙翼, 1579~1655년)이 「퇴계 이문순공에게 올린 제문[祭退溪李文純公文]」에서 퇴계의 학문과 삶에 대해 “낙민[洛學의 二程(程顥, 程頤)과 閩學의 주희]의 학문을 이어받고, 산림에 살찌게 은둔하셨도다[學紹洛閩, 遯肥山林]”라고 하여 퇴계가 비둔한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밝힌다. 조익의 이상과 같은 발언을 좀 더 확장하면, 정탁(鄭琢, 1526~1605)이 읊은 「퇴계 선생에게 올린 제문[祭退溪先生文]」일 것이다. 唯靈 오직 존령께서는 遡波伊洛 伊洛[=程顥와 程頤]을 거슬러 올라가 窮源洙泗 洙泗[=공자가 강학한 洙水와 泗水]의 연원을 찾으셨고 道尊德崇 도가 높고 덕이 숭고하여 所立卓爾 세운 바가 우뚝하셨지요 三韓千載 우리나라 천년의 역사에서 吾道在是 유학이 여기에 있었고 緬惟平日 평소의 행실을 회상하면 進退由義 의리에 따라 진퇴를 하였지요 宅幽勢阻 그윽한 곳에 집을 지으니 退溪之涘 퇴계의 물가에 위치했고 于以棲遲 이곳에서 소요하며 지내니 丘壑之美 산수의 아름다움 함께 했지요 滿架圖書 서가에 가득 찬 도서들은 百年計活 한평생의 생활이었고 風月無邊 청풍과 명월은 끝이 없어 庭草濃綠 뜰의 풀은 짙푸르러 갔지요 퇴계를 존숭하는 후학들은 퇴계가 유학의 정맥을 따라 학문한 정통 유학자의 모습과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긴 두가지 모습을 기억한다. 그 산수지락은 이후 보겠지만 바로 퇴계가 신퇴身退한 이후에 자신의 삶을 비둔이라 일컬은 것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비둔으로 규정한 퇴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퇴계 삶의 반절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아울러 퇴계와 율곡의 차이점을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같은 퇴계의 비둔 지향의 삶은 당시에는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산새[山禽]란 규정이다.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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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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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칼럼] 개와 주식은 팔지 않는다 - 양영권(신방 94) 머니투데이 증권부장
- 양영권(신방 94) 머니투데이 증권부장 나는 반려견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짝 반(伴), 짝 여(侶), 개 견(犬).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짝짝개, 또는 짝개다. 삶을 함께한다는 의미 이상이다. 짝짝개보다 반려견이라는 한자어를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문화사대주의다. 짝은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어울려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 또는 그중의 하나'를 뜻한다. '배필'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도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반려자'라고 하면 부부의 한쪽에서 본 다른 쪽, 배우자를 뜻한다. 개는 사람과 쌍을 이루는 존재가 아니다. 개의 시점에서 다른 개를 말할 때 '짝개'나 '반려견'을 쓰면 정확하다. 사람이 개를 보고 '나의 짝'이라고 하는 건 듣기에 민망하다. 개를 '우리 아기'라고 칭하며 자식같이 대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식이 자신의 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반려견 입양'이라는 말은 '짝이 될 개를 양자로 들이다'는 뜻이 된다. 혼란스럽다. '반려견'이라는 표현이 '반려자'라는 표현만큼 우세를 점하면 개를 인격화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역으로 생각하면 '배우자를 개 취급하는' 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배우자에 대해 '반려자'라는 표현을 버리고 더 존엄한 표현을 찾는다면 표현의 인플레 악순환에 빠진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갇힌다. 반려견이 같이 사는 개를 지칭하는 중립적인 표현으로 굳어지면 개는 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억압당할 수밖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으로 추정하건대 1995년 '동물은 내사랑'이라는 모임에서 반려견이라는 표현을 쓴 게 처음으로 보인다. '반려'라는 표현은 반려묘 반려동물 반려돌(石) 반려식물 같은 식으로 쓰임이 늘어가고 있다. 올 초 몸담은 언론사에서 자본시장을 담당한 뒤로 '반려주'라는 표현도 들었다. 손실이 커서 차마 손절매하지 못하고 계좌에 오래 보관하고 있는 주식을 뜻한다. 코스피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연거푸 경신하면서 이 '반려주'들이 최대 몇곱절의 수익을 냈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듣는다. 반려주와 즐거운 '이혼'을 하고 차익을 실현했다는 사람도 많다. 데리고 산 개를 내다 버리거나 팔면 지탄받지만, 반려주를 이익을 보고 판다면 축하받는다. 나는 반려견이라는 표현은 불편하지만 '반려주'는 투자의 자세 측면에서 건설적이라고 본다. 주식투자를 할 때는 배우자를 고른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증권부장이 되고 나서 투자의 대가들을 다룬 책들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주식투자는 좋은 주식을 고른다기보다 나쁜 주식을 사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기업의 특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시류나 거시경제 여건에 휘둘리지 않고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을 찾아야 한다. 그 주식이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가진 기업이라면 좋다. 투자에 있어 금과옥조처럼 여겨야 할 게 바로 복리의 법칙인데, 복리가 마법을 부리게 하려면 오래 보유해야 한다. 살아있는 투자의 신 반열에 오른 워런 버핏은 뛰어난 기업을 합당한 가격에 사서 영원히 보유하라고 조언한다. 가치투자의 전설 존 템플턴 경은 좋은 투자 실적을 내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은 인내심뿐이라고 했다. 당장의 뉴스에 조건반사로 반응하는 투자는 성공할 수 없다. 실시간 올라오는 뉴스 속보를 체크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하는 게 낫다. 내가 경제지 증권부장이라고 하면 대뜸 좋은 주식 정보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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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총동창회
- 작성일 2025-11-26
